한국 도자사
페이지 정보
작성일 19-07-11 04:41본문
Download : 한국 도자사.hwp
왕실에서 분원을 설치하게 된 중요한 원…(省略)
한국 도자사
Download : 한국 도자사.hwp( 93 )
분원(분원)의 설치로 인한 분청사기의 쇠퇴
분원(분원)의 설치로 인한 분청사기의 쇠퇴광주시 충효동가마에서 나온 「미사」명 (을미년 4월; 1475), ... , 한국 도자사기타레포트 ,
광주시 충효동가마에서 나온 「미사」명 (을미년 4월; 1475), ...
순서
설명
레포트/기타
,기타,레포트
다.
이렇듯 1467, 68년경 관요였던 분원을 설치한 후 중앙 관요였던 분원에서의 자기제작이 백자위주로 되고 또한 백자의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1469년 이전에 이미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의 분원에서는 사옹원에 소속된 장인[관장]들이 중앙공급용의 정교한 백자를 전문적으로 제조하였다. 그 결과 전남 광주 충효동가마를 비롯한 전국에 흩어져있는 가마에서는 더 이상 중앙공급용 도자기를 제작할 필요가 없었고, 이에 따라 지방가마들은 급격히 쇠퇴하였으며 분청사기 양식의 저질화가 가속화되었다. 그 후 예종 원년(1469) 1-3월 사이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최고급 백자를 제작했던 상품 자기소가 이미 사라졌고, 그 후 1469년 완성된 『경국대전』 「공전」에 사옹원 소속 사기장인 중 경공장(경공장)에 대한 기록이 있어 당시에 이미 분원이 운영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내섬사」와 같이 중앙의 여러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하였던 충효동가마가 이처럼 지방가마로 급격히 쇠퇴한 요인은 중앙관청과 왕실에 공급하기 위하여 다른 일군의 가마가 1467-1468년에 경기도 광주에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분원이 설치되었다고 생각되는 시기는 적어도 분원의 본청에 해당하는 사옹원이 사옹방으로 개칭되면서 녹관을 둔 1467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다시 말하면 1467년 4월 이후 1468년 12월 사이에 경기도 광주에 왕실용 백자를 제작하였던 분원 관요가 설치되었다.






분원(분원)의 설치로 인한 분청사기의 쇠퇴
광주시 충효동가마에서 나온 「미사」명 (을미년 4월; 1475), 「정윤이」명(정유년 윤 2월; 1477) 파편들과 「성화 정유」명(성화연간의 정유년; 1477) 분청묘지편들은 분명한 연대를 제시해 줄 뿐 아니라 조잡한 양식을 갖추고 있어 1470년대에 들어서서 분청사기의 급격한 쇠퇴를 여실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