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鄭樵)의 통지(通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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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7-2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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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향리에서는 두 번씩이나 그를 효렴 유일(孝廉 遺逸)로 추천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정초는 《시변망(詩辨妄)》을 지어 사학계에 影響(영향)을 크게 끼쳐 주희마저도 그의 식견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두 책은 시간적으로 80년의 차이가 있으나 하나는 편년사로서, 또 하나는 기전사로 고금을 통관하는 사서였다. 소흥 11년(1141)…(dr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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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정초는 본래 서명을 ‘통사(通史)’라고 하였다가 뒤에 《통지》로 정하였다. 자라서는 실학(實學)을 숭상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연구에 뜻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산으로 들어가 실용적인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이때부터 정초는 독자적으로 독서와 저술에 매진하였다. 정강 2년(1127)에 금군이 남하하여 변경을 점령하고 휘종과 홈종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가게 되자 정씨 형제는 시서(詩書)에만 빠져있을 수 없다 하여 하산하여 금군에 저항하자고 하였다. 가정이 影響(영향)을 받아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였다.
1.정초의 사학
1)일생
정초(1104~1162)는 자가 어중(漁仲)으로 복건 흥화(興化, 현재 복건 보전(莆田)의 한 하층 관리의 집에서 태어났다. 정초가 16세에 협제산으로 들어가 학문을 연구한 이래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고종 건염 3년(1129)까지를 첫 단계로 보아 주로 『詩』,『書』를 중점적으로읽고나서 연구하였으며, 『禮』, 『樂』에 관련된 것을 읽었다.정초의통지 , 정초(鄭樵)의 통지(通志)감상서평레포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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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鄭樵)의 통지(通志)
송대사학은 ‘통(通)’을 구하는 데 특징이 있어 북송중기에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痛鑑)》이 나왔고, 남송 초에 정초가 《통지》를 지어 더욱 뚜렷해졌다. 다시말하면 송대에 일어난 통사의 바람이 정초의 《통지》에 와서 극치를 이룬 것이다. 소흥 5년(1132)에 정후가 예부시험에 합격하여 천주(泉州)의 관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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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의 일생과 정초의 사학,통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16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당형인 정후(鄭厚)와 함께 협제산(夾漈山)에 초당(草堂)을 짓고 평생을 학문 토론과 저술로 보내 그를 협제선생이라 불렀다.정초의 일생과 정초의 사학,통지에 관한 내용입니다.